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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선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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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작센 선제후국(독일어: Kurfürstentum Sachsen, 또한 Kursachsen)은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4세로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이다.
2. 역사[편집]
성립 당시에는 비텐베르크 일대의 오늘날 작센안할트 지역만 소유하고 있었으나, 1423년 아스카니아 가문이 단절되자 카를 4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베틴 가문의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작센 선제후직을 수여하면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된 프리드리히 4세는 작센의 중심지를 엘베강 상류의 비텐베르크에서 베틴 가문의 중심지였던 마이센 변경백국(Markgrafschaft Meißen)으로 옮겼고 이로서 과거에는 마이센(Meißen)이라 불리던 지역이 작센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튀링겐 변경백국(Landgrafschaft von Thüringen)까지 상속받아 분할되었던 베틴 가문의 영지를 통합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작센 선제후국을 물려받은 맏아들 에른스트는 동생 알브레히트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라이프치히 분할 조약을 맺어 비텐베르크 일대와 튀링겐, 작센 선제후 직위(Kurfürst von Sachsen)는 자신이 가져갔고, 마이센 일대는 알브레히트에게 주어 작센 공작(Herzog von Sachsen)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에른스트의 맏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작센 선제후국은 독일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패배하여 카를 5세의 편에 선 알브레히트의 손자인 6촌 작센-마이센의 모리츠에게 작센 선제후 직위와 영지 대부분을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목숨만 부지했고 1547년을 기점으로 알브레히트계가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계가 작센 공작이 되었다. 이 교환은 1567년 최종 승인되어 알브레히트계가 확고한 작센 선제후직을 차지했다.
17세기 중반까지도 작센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루터파 국가의 맹주였으나 점차 이웃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1] 에게 우위를 내주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이웃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거에 참전해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아들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를 패배시키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가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게 패퇴하여 국력 대부분을 소모했고,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루터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귀족 및 백성들의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후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계는 계속 가톨릭 신앙을 유지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기 전까지 루터파 세력의 대표를 가톨릭 제후가 맡는 모순이 이어졌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 왕국으로 승격시켰다.링크
3. 역대 선제후[편집]
4. 여담[편집]
작센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렵장관(Lord High Masters of the Chase)'을 겸했다고 한다. 그래서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붉은사슴만도 35,421마리를 사냥했고, 아들 요한 게오르크 2세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42,649마리나 사냥했다. 요한 게오르크 2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거부한 것도 보헤미아 수사슴이 작센 수사슴보다 작아서였다고 한다.